운명애
운명애
  • 이건혁
  • 승인 2019.09.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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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사람들은 옷깃을 여민다. 매서운 바람이 골목을 들이치고 있다. 말이 푸드덕 거린다. 지친 듯, 더는 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수차례 돌리고는 연이어 거친 숨을 내뱉는다. 추운 겨울이라 말이 내뿜는 숨마다 김이 매섭게 나온다. 말의 눈동자의 색은 희미해졌고 다리는 자꾸만 힘이 빠져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연신 휘청 인다. 그러나 마부는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휘두른다. 그의 채찍질에 존중이나 배려는 없다.

이 때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달려든다. 남자의 어지러운 콧수염은 입술을 덮었고, 가뜩이나 넓은 이마는 조금씩 벗겨지는 머리를 따라 그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 같다.

그만하시오! 그만하시오!”

남자는 채찍질과 고된 일정에 쓰러진 말을 부둥켜안으며 소리쳤다. 아니 절규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8441015, 프로이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대에는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으나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5살에 그의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사망했고, 7살에는 남동생 요제프가 사망했다. 세상에 호기심을 느끼려던 찰나, ‘죽음의 의미부터 배워야했다. 그 스스로도 죽음과 가까웠다. 26, 젊은 나이부터 병으로 시달렸고,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토록 암울해 보이는 인생이지만 그는 저서를 통해 ‘Amor Fati‘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제는 트로트 제목으로 유명한 이 말을 직역해보면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한자로는 운명애(運命愛)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직역으로만 들어보면 인생의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모두 인정하고 사랑하라는 조금은 수동적인 말로 들린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니 받아들이자는 식으로.

그러나 니체의 여러 사상을 길게 선으로 놓고 해당 개념을 그 위에 한 점으로 놓고 본다면 조금은, 아니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수동적이고 순응하는 운명애의 개념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조금은 반항적인 성격의 운명애가 되는 것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를 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면 넘어지고 실패하면 그건 네 모습이 아니야? 그런 네 모습마저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한다. 사랑, 시험, 선택 등등. 어쩌면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더 많이 경험하며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원망할 필요 없다. 실패를 벗 삼아 미래에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그리고 그 때에 과거의 당신을 보며 덕분에, 그 실패를 딛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격려해주는 것은 어떨까.

 

이건혁 기자

rjsgur9968@sch.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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