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인어공주와 PC주의
최근 월트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 영화가 개봉하며 국내외에서 화두에 오르고 있다. 좋은 의미의 ‘화제’보다는 ‘논란’에 가까운 의미이다. 작품 자체보다 캐스팅 등 제작 방향을 둘러싼 이슈에 휘말렸다. 1989년 원작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붉은 머리의 백인 캐릭터 '에리얼'을 2023년 실사 영화에서는 흑인 가수 겸 배우 할리 베일리가 맡았기 때문이다. 2010년대에 들어 다양한 인종과 사회적 소수자 캐릭터들을 본격적으로 작품에 포함하기 시작한 디즈니가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를 지나치게 강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PC주의는 인종, 성별, 종교, 성적지향 등과 관련해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이 섞인 표현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흐름은 불특정 다수에게 파급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문화 콘텐츠에도 반영됐다. PC주의의 메시지는 세계적인 미국의 콘텐츠 기업 '월트 디즈니'의 작품에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양성 확장 VS 원작 정체성 훼손
'인어공주'를 둘러싼 논쟁은 원작 훼손에서 비롯됐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에리얼은 빨간 머리의 백인인데 실사의 에리얼은 흑인으로 바뀐 것이다. 1970~1980년대 극심한 침체에 빠졌던 월트 디즈니를 일으킨 작품이 바로 1989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다. 인어공주는 디즈니는 르네상스의 시대를 열었던 대표작이고 그만큼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팬들도 많다.
그러나 2023년 판 '인어공주' 에리얼은 우리 기억 속 에리얼의 외형을 완벽히 벗어나며 많은 원작 팬들의 실망을 자아냈다. 흑인 에리얼에 대한 거부감은 '#NotMyAriel(나의 에리얼이 아니야)'이라는 SNS 해시태그 활동으로 이어졌다. '인어공주' 세계관과 스토리 속 동떨어진 이미지의 에리얼은 원작의 정체성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반면 리메이크작의 새로운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시대 분위기에 맞춰 작품을 구성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하는 것이다. 한편 '인어공주'의 감독 롭 마셜은 인터뷰를 통해 "베일리가 첫 번째 오디션 참가자였는데 그의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아 울고 말았다. 그 뒤의 오디션에서도 베일리를 뛰어넘는 사람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인어공주, 결과는?
이념에 매몰된 무리수는 흥행참패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수) 국내에서 개봉한 '인어공주'의 누적 관객 수는 63만 명이다. 개봉 3주 차 주말(6월 9일~11일)에도 2만 3천여 명을 모으는데 그치며 박스오피스 5위까지 떨어졌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국내에서 100만 관객 돌파는 어려워 보인다.
영화수익지표 웹 사이트 'Box Office Mojo'에 따르면 북미와 해외 수익을 합친 총매출은 4억 1,1797만 달러인데, 이 중 해외 매출액은 1억 8,565만 달러에 불과하다. 그동안 자국보다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디즈니 실사 영화에 비해 해외 매출이 현저히 부진한 것이다. 영화의 제작비는 약 2억 5,000만 달러(한화 3,199억)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손익분기점은 약 6000만 달러(한화 약 7,166억 원)로 추정된다. 현재 추세라면 손익분기점 돌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콘텐츠는 선생님이 아니다
디즈니가 비판받고 있는 본질적 원인은 원작이 있는 작품에 멋대로 변주를 준 것이다. 만약 디즈니가 원작이 없는 새로운 창작물로 접근했다면 흑인 공주든 동양인 공주든 이 같은 논란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작품과 캐릭터에 많은 팬들의 기대를 무시했다는 점이 비판을 받는 이유다.
디즈니는 PC주의를 콘텐츠에 담아 사람들에게 인종, 성별, 성 정체성 등의 편견을 없애고 다양성 존중의 인식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메시지는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수용자들이 콘텐츠로부터 '가르치려드는' 느낌을 받는 순간 콘텐츠는 성공과 한 발자국 멀어질 수밖에 없다.